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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록

[일상록] 오늘도 난 탁구공을 뺏긴다

결전의 날

오늘은 결전의 날이다. 경건한 마음으로 운동화를 신고 탁구장으로 향한다. 현재시각은 오후 5시 30분이다. 이제 곧 있으면 우리동네 탁구 고수 삼촌들이 탁구장에 올 시간이다.

탁구장에 도착했다. 에어컨의 시원한 바람이 나를 맞이한다. 하지만 이는 곧 고수 삼촌과 게임을 하며 피바람으로 바뀔 것이다. 나는 삼촌들이 오기전에 몸을 푼다. 탁구화로 갈아 신은 뒤, 가볍게 하체부터 시작하여 목까지 스트레칭 한다.

고수님들이 하나 둘씩 탁구장에 입장하신다. 이 중 오늘 나랑 게임이 계획되어 있는 철이삼촌도 보인다. 나는 철이삼촌과 인사를 나눈다. 서로에게 인사할 때는 그 어느때보다 활짝 웃으며 인사한다. 철이삼촌은 직장에서 바로 오시기에 옷부터 갈아입으신다. 말끔하게 준비된 탁구복을 입은 철이삼촌 모습은 정말 멋있다.

철이삼촌이 나를 부른다. 게임 전 몸풀기 랠리를 할 시간이다. 처음에는 프론트 핸드를 연습한다. 삼촌분들은 이를 ‘화’를 친다고 표현한다. 우선 가볍게 화를 치고, 어느 정도 팔이 풀리면 어깨를 풀어주기 위해 드라이브를 치기 시작한다. 화를 칠때보다는 약 1미터 정도 탁구대에서 멀리 떨어져 서로의 드라이브를 맞받아 치며 연습을 한다. 이렇게 약 5분 정도 지나면 백핸드도 연습한다. 일명 ‘숏’이라고 표현하는 동작이다. ‘숏’으로도 드라이브까지 연습한다. 이후에는 커트를 서로 짧게 주고받으며 연습 랠리를 마무리한다.

연습 랠리가 끝났다. 연습 랠리 동안 흘렸던 땀을 닦는다. 이때 탁구 테이블도 닦는다. 땀을 닦지 않으면 탁구공이 테이블에서 미끄러져 불규칙하게 튀기 때문이다. 테이블을 닦고 물을 한 컵 마신다. 내가 물을 마실 동안 철이삼촌은 다른 여럿 이모 삼촌들과 대화 중이다. 어렴풋이 “어우, 오늘은 좀 정쌤 상대로 살살 쳐”라는 대화도 들린다. 하지만 철이삼촌은 어림도 없다. “에이, 게임에 봐주는게 어딨어? 난 안 봐줘.”


폭풍전야

관중이 하나 둘씩 모여든다. 항상 아쉽게 고수 삼촌들에게 패배하는 나의 게임은 이모, 삼촌, 그리고 어르신들까지 많이 구경하신다. 내가 항상 치열한 승부 끝에 패배하기 때문에 아낌없는 응원을 해주시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다르다. 연습 랠리동안 특히 드라이브 느낌이 좋았다. 탁구 레슨을 받으며 연습한 성과가 드디어 느껴진다. 굽혔던 다리를 펼치고 허리를 비틀며 팔을 회전하는 일련의 동작이 오늘은 더 부드럽게 느껴진다. 공이 채에 맞는 순간의 손맛도 탁월하다. 이렇게 나의 심장은 활활 타오른다.

앞서 언급했듯, 나의 게임은 관중이 많다. 관중이 많은 게임은 항상 누군가가 심판을 봐주신다. 심판을 하면 치열하게 오가는 게임 랠리를 타구 테이블 바로 옆에서 보다 더 가깝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게임이 시작하기전 나와 철이삼촌은 서로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한다. 이후 심판에게도 인사한다. 이는 탁구장 기본 예의이다. 만만한 상대가 아닌 만큼, 나는 최대한 예의를 갖춰 정중히 인사한다. 철이삼촌과의 최근 경기에서 내가 패배했으므로, 나의 서브로 시작한다. 이는 하수를 위한 고수의 마지막 배려이다.


치열한 승부

피나는 연습 끝에 완성한 프런트 사이드 스핀 장서브로 게임을 시작한다. 나의 강점은 젊음을 기반으로 한 체력과 속도이다. 따라서 긴 랠리를 유도하며 공격 타이밍을 잡는 것이 나의 주된 득점 방법인데, 스핀 장서브가 이에 적격이다.

역시 고수답게 나의 필살기 서브를 철이삼촌은 역회전 백 드라이브로 대응한다. 이론상 최고의 대응이다. 역시 고수인 만큼 정면 승부를 택하신다. 나도 물러 서지 않고 백드라이브로 맞받아친다.

네 번의 백드라이브가 오간다. 이 순간만큼은 탁구공이 탁구채와 테이블에 맞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는다. 탁구는 매 순간 찰나의 반응을 요구한다. 이렇기에 모든 신경이 탁구공에 집중하게 되고, 다른 외부 자극은 느껴지지 않게 된다.

순간 삼촌의 백드라이브가 미스가 났다. 바로 나의 화쪽으로 탁구공이 온 것이다. 마침 어깨 높이까지 튀는 궤적이다. 드라이브를 치기위한 최적의 타이밍이다. 탁구 레슨 동안 수없이 연습해온 백드라이브 후 프런트 드라이브를 치면 되는 상황이다.

나는 지체없이 화쪽으로 달려가 팔을 뻗는다. 모든 것이 완벽하다. 고민없이 프런트 드라이브를 시도한다. 이동하며 드라이브를 걸어야 하기에 시야는 조금 흐리지만, 나의 몸은 직감적으로 움직인다.


한 끗 차이

나의 탁구채가 공에 닿으려는 순간, 탁구공의 궤적이 순간 더 바깥쪽으로 휘기 시작한다. 내가 철이삼촌의 사이드스핀 덫에 걸린 것이다. 나의 야심 찬 드라이브는 보기 좋게 비껴 맞는다. 탁구공은 저 멀리 관중석까지 날아간다.

치열했던 랠리의 열기가 식기도 전에, 관중 속 삼촌이 말한다. “이야, 이제 철이가 저렇게까지 쳐야 이기네.” 그렇다. 고수인 철이삼촌은 이전까지 나에게 사용하지 않았던 기술을 사용한 것이다. 철이삼촌의 횡회전은 내가 이때까지 봐왔던 스핀과 차원이 달랐다. 마치 공이 공중에서 춤을 추 듯 궤적이 변하였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며 나는 게임에 임한다. 나는 끊임없이 공격하는 창이고, 철이삼촌은 계속 맞받아치는 방패다. 서로 좌우로 흔들기도 하고, 테이블에서 2미터 떨어진 곳에서 맞받아치기도 하며 치열하게 싸운다. 점수까지 잊고 랠리를 이어 갈만큼 정말 치열한 승부다. 탁구장은 어느 순간 고요 해진다. 저 멀리서 대화하던 이모 삼촌까지 수다를 멈추고 나와 철이삼촌의 게임을 구경한다.

현대판 콜로세움을 방불케 하는 승부의 결과는 나의 쓰라린 패배였다. 세트 스코어는 3 대 1이다. 중간에 듀스로 16 대 14까지 진행한 세트를 이겼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몰려온다. 마지막 세트에서 집중력을 잠시 잃고 서브 미스를 하지 않았다면, 드라이브를 걸 때 몸을 좀만 더 낮췄다면, 내가 스핀을 좀더 잘 읽었더라면 등등 수많은 후회와 자책이 뒤를 잇는다. 탁구채를 오랜 시간 동안 잡으며 생긴 굳은살이 이 승부의 치열함을 연상시킨다.


패배의 치욕스러움

아무리 마음이 아파도 예의는 지켜야 하는 법이다. 나는 승부가 끝나고 철이삼촌과 악수를 하고 심판을 봐주신 이모분께 인사한다. 겉으로는 웃지만 마음만큼은 활활 타오르고 있다. 1세트 초반 철이삼촌의 사이드 스핀이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

패배자에게 마지막은 정말 치욕스럽다. 패배자가 승자에게 본인의 새 탁구공 한 개를 줘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 탁구장의 유구한 전통이다. 참고로 우리 탁구장은 회원이 많기 때문에, 공을 잃지 않고자 탁구공에 본인의 이름을 적는다. 승자인 삼촌에게 나는 언제나 그랬듯이 내 공 하나를 건넨다.

철이삼촌은 나의 탁구공을 받으며 본인의 탁구공 수집통을 꺼낸다. 투명 플라스틱을 통해 내 이름이 적혀 있는 수많은 탁구공이 보인다. 주변삼촌 분들이 “이를 어쩌냐”라는 위로의 말씀을 한다. 철이삼촌은 승리에 취해 웃고 있다.


탁구공... 그까짓 것

오늘도 난 탁구공을 뺏긴다. 내일도 모레도 난 탁구공을 뺏길 것이다. 하지만 마음 속 깊이 철이삼촌과 또 치고 싶은 감정이 올라온다. 철이삼촌이 아니면 만족이 되지 않는 아이러니한 승부욕에 갇혀버린 것이다.

집에 돌아와 샤워를 한다. 따뜻하게 흐르는 물을 맞으며 나는 오늘도 언젠가는 탁구공을 얻어낼 것이라고 다짐한다. 나는 철이삼촌의 공을 얻기 위해 아낌없이 내 탁구공을 희생할 것이다.

창 밖에 보이는 달마저 탁구공으로 보인다. 아쉽게도 탁구공을 얻을 수 있는 기회는 하루에 단 한번만 온다. 이렇기에 나는 내일이 빨리 오길 기원하며 기나긴 하루를 마무리한다.


마무리 하며

저의 오랜 취미활동인 탁구에 관한 일화를 조금 각색하여 작성해 보았습니다. 탁구가 저를 활기차게 하듯이, 독자분들도 저의 글을 통해 에너지 넘치는 하루가 되었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미국 대학원 생활 by 정쌤

저의 미국 대학원 생활과 일상을 여러분과 공유합니다. 학부 전공은 생물학이며 대학원 전공은 유전학입니다. 대학원 준비 과정부터 생활까지 알차고 재미있게 작성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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